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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은 왜 '선도문화의 땅'이 되었을까...신화와 역사를 따라 걷다 - 선도문화답사기 ①

선도문화답사기 1

강릉은 왜 '선도문화의 땅'이되었을까…신화와 역사를 따라 걷다

 

강릉과 오대산

우리는 역사시대 지구에서 제일 먼저 국가를 건설한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곳곳 어디서나 유구한 역사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수년 전 태백산 지역을 답사하면서 선도문화 유적이 많이 남아 있음을 알았다. 태백산 정상에 단군조선과 신라 때 쌓았다고 알려진 제천단이 있고, 산 아래에 근래에 지은 단아한 단군전(殿) 앞에 단군 좌상이 있었다. 놀랍게도 단군전 입구 주차장 옆을 흐르는 개천 이름이 소도천(蘇塗川)이었다. 소도는 단군조선에서 하늘에 제사한 성스러운 장소다. 단군조선 와해 후 이천 오백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소도‘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현장은 경이로왔다.

이번에 답사할 지역은 강릉시와 오대산 자락이다. 강릉은 태백산맥 동편에서 평지가 가장 넓은 지역이라 옛부터 포항 이북 환동해권 중심이었다. 강릉 동쪽은 동해이고, 서쪽은 대관령과 접하고, 서북으로 오대산이 가깝다. 이번 답사는 강릉시 일원 역사 유적을 답사하여 우리 선도(仙道)문화 잔영을 확인하고, 오대산 일대 불교 문수(文殊)신앙과 선도의 관련성을 찾아보려는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답사기간은 2026년 5월 16, 17일 이틀이다. 16일에는 강릉시 유적을 답사하고, 17일에는 오대산 자락을 헤맬 예정이다. 참가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한국유라시아연구원 회원 17명이다.

 한국선도 전통을 간직한 품격 있는 고장 강릉

답사에 참가하는 한국유라시아연구원 회원들이 부산 창원 안동 전주 대전 춘천 서울 등 각지에서 출발하므로 12시 강릉역에 모이기로 했다. 청량리에서 8시 58분 KTX이음 기차에 올랐다. 10시 45분 강릉역 도착 예정이다. 이 KTX 노선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개통한 길이다. 얼마나 좋아진 세월인가. 서울에서 강릉까지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좌석이 만석이다. 중간에 정차하는 역은 별로 없고, 강릉에 가까운 만종 황성 둔내 평창 진부 역에는 모두 정차하니 태백산맥 자락 소읍 관광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는 길이다. 신록의 계절 5월에 떠나는 여행이라 가슴이 상쾌하다. 산을 통과하는 길이니 예상했던 대로 터널이 많다. 정시에 강릉역에 도착했다. 원형으로 지은 강릉역 청사가 썩 마음에 든다. 주차장도 넓다. 일행과 합류하여 막국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강릉이 처가인 연구원 부원장이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한과 한 상자를 사왔다. 조청으로 만든 전통 한과다. 어릴 적 큰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그 맛이다. 오늘 답사 일정은 신복사지(神福寺址) ⭢ 강릉시립박물관 ⭢ 허균‧허난설헌 유적 ⭢ 명주군왕릉(溟州君王陵) ⭢ 경양사(鏡陽祠) 순서다. 답사할 유적이 모두 강릉시에 있고, 차로 10-25분 거리라 멀지 않다.

대절한 버스에 올라 신복사지로 향했다. 《강릉읍지》에는 신복사가 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창건한 절인데 조선조 어느 시기에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지금 복원된 유적은 대략 500평쯤 돼 보이는 북향의 절터와 묻혀 있던 3층 석탑과 공양보살좌상을 발굴하여 바로 세워놓은 것뿐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살이 탑전에 꿇어앉아 기도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이런 구도는 처음 본다. 불상과 불화가 일반화 되지 않았던 시기 탑을 부처님 몸으로 신앙했던 모습일 것이다. 탑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아주 단아한 느낌을 준다. 사진에 잘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기도하는 보살 얼굴은 후덕하기 그지없다.

사진1 신복사 3층 석탑과 공양보살좌상. 제공 허성관
사진1 신복사 3층 석탑과 공양보살좌상. 제공 허성관

그런데 이 절터 주소가 ‘강릉시 범일로’이다. 행정안전부가 근래에 도로명 주소를 만들면서 신복사 창건자 범일국사를 기려 ‘범일로’로 이름 했을 것이다. 범일국사는 강릉 일원 역사와 정신사에 큰 자취를 남긴 분이다. 범일 스님은 강릉지역 대호족 강릉 김씨라고 전한다. 신라 말기 교종(敎宗) 중심 불교에서 새로이 선종(禪宗) 불교가 세력을 떨치면서 구산산문(九山山門)이 일어났는데 범일국사는 이 중 하나인 사굴산문(闍堀山門)을 굴산사에서 세웠다. 교종은 경전 가르침을 공부하여 깨달음에 매진하고, 선종은 수행과 명상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불교 종파다. 현재 우리나라 조계종은 선종이 그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니 범일국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에서 큰 자취를 남긴 스님이다. 구산산문은 사굴산문 외에 실상산문(남원 실상사) 가지산문(장흥 보림사), 동리산문(곡성 태안사), 성주산문(보령 성주사), 사자산문(영월 흥녕사), 회양산문(문경 봉암사), 봉림산문(창원 봉림사), 수미산문(해주 광조사)이다. 이 중에서 현재 실상사 보림사 태안사 흥녕사 봉암사가 남아 있고, 나머지 네 절은 폐사되었다. 나는 실상사 태안사 봉암사를 찾은 적이 있으나 이 절들이 구산산문의 하나인지는 몰랐다. 그런데 사굴(闍堀)이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옥편에는 闍가 ‘망루 도’ 또는 ‘사리 사’라고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는다. 아마도 闍는 산스크리스트어를 음차한 글자일 수도 있겠다. 몇 년 전 굴산사 옛 터를 찾았을 때 높이 5m가 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당간 지주 한 쌍이 남아 있어 절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진2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굴산사 옛 터 당간지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2014)
사진2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굴산사 옛 터 당간지주.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2014)

당시 현장에서 신이하지만 뭔가 익숙한 범일국사 탄생 설화를 들었다.

“옛날 옛적 강릉 학산 마을 양가집 한 처녀가 우물에 물 길으러 갔다. 바가지로 물을 뜨니 영롱하게 빨간 해가 바가지 물에 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처녀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물을 떠도 빨간 해가 여전히 떠 있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 처녀가 그 물을 마셨는데 얼마 후에 태기가 있었다. 산달이 되어 처녀는 남자 아이를 낳았다. 처녀 부모는 딸이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았다고 가문의 수치로 여겨 근처 학산 바위굴에 아이를 내다 버렸다. 아이가 걱정이 되어 며칠 후 처녀가 바위굴을 찾았더니 학이 날개로 아이를 품어주고, 붉은 과일을 먹이며 보살피고 있었다. 범상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처녀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길렀는데 이 아이가 후일 범일국사이다”

이 설화는 어머니가 ‘태양을 삼키고 임신’했으며, ‘버려진 아이를 학이 날개로 품어주고 빨간 과일(朱果)을 먹였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우리 신화에서 우박이나 주과를 먹거나 빛에 감응하여 임신하고, 버려진 아이를 새와 짐승이 돌보는 사례는 보았지만 ‘태양을 삼키고’ 임신한 사례는 범일국사에서 처음 본다. 태양을 삼키고 태어났다고 이름도 ‘청정하고 밝은 해’를 의미하는 범일(梵日)로 지었다고 전한다. 사실 우리 신화에서 주인공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모두 확실하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애매한 경우가 많다. 범일국사는 오늘날 강릉단오제 주신(主神) 대관령국사성황신(大關嶺國師城隍神)으로 모셔 강릉 사람들의 신앙 대상이다. 처녀가 해를 마셨다는 우물이 석천(石泉)인데 지금도 보존되어 있고 근처에 학바위도 있다. 사굴사 옛 터 주소가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인데 학산리는 범일국사 설화의 학바위에서 유래한 지명일 것이다. 다음 답사 일정 강릉시립박물관에 범일국사 이야기가 더 남아 있을 것이다.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오죽헌과 동양자수박물관이 인접하고 있다. 부지가 매우 넉넉하다. 강릉이 평지가 넓은 넉넉한 도시인 듯하다. 강릉 지역에서 수습한 선사유물과 전통문화와 관련된 전시물이 충실해 보인다. 예상했던 대로 범일국사 이야기를 전하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3.  대관령국사성황신 범일국사. 사진 허성관
사진 3. 대관령국사성황신 범일국사. 사진 허성관
사진 4. 대관령국사여성황 정씨. 사진 허성관
사진 4. 대관령국사여성황 정씨. 사진 허성관

<사진 3>은 대관령국사성황신 범일국사 그림이다. 백마를 타고 호랑이 두 마리를 거느린 모습이다. 우리 민화는 대체로 호랑이를 다정스럽게 그리는데 여기 호랑이는 극도로 긴장하여 경계하면서 국사를 호위하는 상이다. 범일국사는 입적 후 성황신이 되었는데 백마 탄 무장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사진 4>는 성황신 부인 초계 정씨 영정이다. 성황신을 모시던 호랑이가 성황신의 외로움을 풀어주고자 밤에 마을에 내려가 초계 정씨 낭자를 업어와 성황신과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산신과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설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풀길이 없다. 강릉은 매년 4월 15일 단오제를 대대적으로 지낸다. 단오제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 13호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자랑스러운 전승이다. 단오제 핵심 행사가 성황신과 성황 모에 대한 제사 ‘영신제’라고 한다.

영신제를 취재한 어떤 기자는 ‘유교와 무속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평가했다. 어떤 이는 ‘신시(神市)에서 거행된 축제 형식을 따른 제사’라고 글을 썼다. 영신제 사진에 제관들이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있으니 제례가 유교식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산신제는 신시 배달국 이래 이어진 하늘에 제사지내던 천제(天祭) 유습이다. 천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지향한 우리 고유사상 선도(仙道)의 집단 수련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우리 겨레 국가에서 면면히 이어졌고, 고려는 팔관제라는 거국적 행사로 치렀다. 그러나 성리학이 고려말에 득세하고 조선에서 국시(國是)가 되자 선도는 설 땅이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선도는 홍익인간을 지향하지만 성리학은 사대부 정치 독점을 지향하는 신분제를 고수하는 서로 상극인 사상이어서 극심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선도 핵심인 수련은 무속 내지 미신으로 전락하고, 거국적인 제천은 산신제 동제(洞祭) 형태로 변해 명맥을 이어왔다. 강릉 단오제는 산신제로 명맥을 이어온 선도제천이 나라가 살만해지자 지역의 큰 행사로 진화하여 부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강릉단오제가 바로 신시배달국 이래 우리 겨레 선도제천의 유습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선도제천에서 선도와 상극인 성리학 예법으로 제사를 지낸다니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범일국사가 스님인데도 불구하고 선도제천에서 주신으로 모셔져 있는 사실은 이 분이 스님이면서 아마도 선가(仙家)의 큰 스승으로 강릉지역에서 존숭받았던 역사를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박물관에 인접한 오죽헌은 일행 모두 관람한 적이 있어 생략하고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유적지로 이동했다. 유적지에는 전시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생가가 있다. 소나무가 무성하고 부지가 넓은데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강릉시가 주변 땅을 사들인 것 같다. 허난설헌은 양천 허씨로 이름이 초희(楚姬)이고, 대사성과 도승지를 지낸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딸이다. 양천 허씨는 고려에서 조선 초기까지 벌족이었고 근거지가 서울인데 허엽이 어떻게 강릉에 자리 잡았는지 궁금했다. 살펴보니 허엽이 첫째 부인 한씨와 사별하고 강릉 김씨를 재취로 맞아 강릉과 연고를 맺었다. 허엽과 한씨 부인 사이에 딸 둘과 아들 허성(許筬, 1548∼1612)이 태어났고, 김씨 부인과 사이에 처가에서 마련해준 강릉 집에서 아들 허봉(許篈, 1551∼1588) 딸 초희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강릉은 허봉 허난설헌 허균의 외가 고장이다. 허난설헌은 허균 누님이다. 세 아들 이름 한자가 ‘풀 초(艸)’ 변으로 시작하는 것은 항렬에 따라 이름을 지은 결과이리라. 세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이 筬은 이조판서, 篈은 창원부사, 筠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허초희 난설헌은 조선 최고 시인 중 한사람이다. 동생 허균이 그녀 시를 모아 1608년 명나라에서 출판하여 찬사를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 분다이 야지로(文台屋次郞)가 그녀 시집을 출간하어 애송되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시인으로 K-문학 선구자인 셈이다. 하지만 가정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과 갈등, 시어머니와 불화, 어린 남매를 잃는 슬픔으로 27세에 요절했다. 성리학 질곡 조선에서 천재 여인이 행복한 삶을 꾸리기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부질없는 생각이겠지만, 그녀의 이름 초희(楚姬)의 ‘楚’자에는 ‘가시나무와 회초리’의 뜻이 있으니 불운한 삶이 운명이었을까? 난설헌 오빠 허봉은 외가가 같은 강릉인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도리어 귀양 간 적도 있다. 동생 허균은 《홍길동전》을 지어 우리 모두 잘 안다. 허균은 신분제를 근본으로 하는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에서 신분제에 저항하다 사형당한 시대를 앞선 풍운아였다.

허엽, 그의 세 아들, 딸 초희, 이 다섯 사람을 세상에서는 양천 허씨 오문장(五文章)으로 불렀다. 유적지 전시관에 들어서니 주로 허균과 난설헌 관련 문헌이 많다. 먼저 눈에 들어온 전시물은 허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허균을 평가한 글이다. “허균이 고서를 전송(傳誦)하는 것을 들었는데 유‧불‧도 3가의 책을 닥치는 대로 시원하게 외워대니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도(道)’는 중국 도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우리 전통 선도(仙道)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허균은 중국 도교의 본령인 장생불사에 관심을 보인 흔적이 없고, 오히려 신분제 타파를 비롯한 한국 선도의 홍익인간 구현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허균의 선가적 행적에는 아버지와 형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균 아버지 허엽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제자였다. 화담은 유학자였지만 선가적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기일원론(氣一元論)과 ‘죽음은 우주의 기에 환원하는 것’이라는 생사일여론(生死一如論)이 선도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화담의 가르침이 허엽을 거쳐 허균에게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허균의 형 허봉이 지은 책 중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가 있는데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조천(朝天)은 선도 용어이다. 전시관에는 중국에서 간행한 난설헌 시집 목판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 참 대단하다. K-시집 원조 목판을 수백 년 전 중국에서 구해 간직해오다 전시해놓았으니 말이다.

전시관을 나와 조금 가니 양천 허씨 5문장 시비를 세워 놓았다. 죽 둘러보니 난설헌 오빠 허봉이 쓴 시 칠언절구 ‘난하(灤河)’가 눈에 뜨인다. 난하가 어디 있는 강인가? 중국 하북성 열하(熱河, 지금은 승덕시)에서 발원하여 창려현에서 발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난하 주변은 단군조선 서쪽 국경선이었다. 상고시대 고죽국(孤竹國) 땅이고,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살던 마을도 있다. 명(明)나라 시기 건설한 영평부 성이 근처에 있는데 아마도 허봉은 영평부 성에서 ‘난하’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도 영평부를 지나면서 ‘영평부가 옛 우북평’이라고 쓴 표지를 보았다고 《열하일기》에 썼다. 허봉이 난하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짧은 한문 지식으로 이 시를 번역해 보려하니 마지막 구절 중 ‘烟謁(연알)’에 걸려 옥편을 들여다봐도 풀리지 않는다. 제미나이(gemini)에게 물었더니 ‘아뢸 謁(알)’은 ‘아지랑이 靄(애)’를 잘못 쓴 것이라고 일러준다. 시비의 謁을 靄로 고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시는 허봉이 영평부성 서문 누각에 올라 쓴 시일 것이다. 영평부 서문 위 성벽에 ‘서울(북평=북경)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의미로 ‘망경(望京)’이 새겨져 있어서 허봉이 불현듯 북평 쪽을 바라보았을 수도 있겠다.

사진 5.  허봉의 시 난하. 제공 허성관
사진 5. 허봉의 시 난하. 제공 허성관

灤河

孤竹城頭月欲生/灤河西畔聽鐘聲/扁舟未渡尋沙岸/烟謁蒼蒼古北平

고죽성 마루에 달 떠오르려 하고/난하 서쪽 강변에서 종소리 들리네

조각배 대려고 모래 기슭 찾는구나/연기 아지랑이 자욱한 저 곳 옛 북평이겠네

양천 허씨 5문장 시비 옆에 난설헌 청동 좌상이 있다. 책을 읽는 모습인데 시선은 책을 향하지 않고 앞을 바라보는 상이다. 좌상 받침대도 너무 커서 균형이 맞아 보이지 않는다. 좌상 사진 대신에 난설헌 초상을 아래에 첨부(<사진 6>)한다. 이 사진 원본 초상화를 언제 누가 그렸는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확인이 안 된다. 난설헌 상은 단아한 젊은 사대부가 여인 상이다. 화려하지도 않고 빼어난 미인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친근해 보이는 상이다. 조선 여인상 중에서 책을 읽고 있는 상은 아마 허난설헌이 유일할 것이다. 청동 좌상 앞에는 일찍 저세상으로 간 어린 남매를 그리워하는 애끓는 모정과 복중 태아가 잘 자라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근심이 절절이 배어난 난설헌 시 곡자(哭子, 자식을 곡함)를 새겨 놓았다. 곡자는 널리 알려진 시다.

 

사진 6 허난설헌 상. 제공 허성관
사진 6 허난설헌 상. 제공 허성관

곡자는 朗吟黃臺詞/血泣悲呑聲(낭음황대사/혈읍비탄성)으로 끝맺는데, 번역은 모두 ‘황대사를 낭낭하게 읊조리며/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슬피 우노라’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황대사(黃臺詞)’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체 황대사가 무엇이길래 앞세워 떠나보낸 자식들 생각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읊조렸을까? 찾아보니 당(唐) 나라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 이현(李賢, 655∼684)이 지은 시 황대과사(黃臺瓜辭)가 황대사라고 되어 있다. 측천무후는 당 고종 황후였는데 고종이 죽자 정권을 장악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다. 자기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면 권력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인 태자를 죽였다. 둘째 아들로서 태자였던 이현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어머니 측천무후가 자식들을 죽이지 말라고 황대과사를 지었다고 한다. 내용인즉, 황대에 참외 농사짓는 농부가 실하게 익은 순서대로 참외를 따는 것을 어머니 측천무후가 자식 죽이는 것에 비유한 시라고 한다. 이 황대과사가 측천무후 귀에 들어가 이현은 유배되어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 난설헌이 황대사를 읊은 것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 힘을 가진 자에게 복중 태아는 데러가지 말라고 간구하는 주문이었을 것이다. 황대과사도 외우는 참으로 박식한 여성은 당시 조선에서는 아마도 난설헌밖에 없었을 것이다. 난설헌 좌상 오른쪽에 생가가 있다. 허균이 1618년(광해군 10년) 반역죄로 사형당하자 집안은 풍비박산되고, 생가도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고 한다. 주인이 바뀌면서 생가는 개보수되어 원형을 잃었다고 안내 인쇄물에 기재되어 있다.

천재들이 태어난 터를 나와 강릉시 성산면 삼왕길 204-39의 명주군왕릉(溟州君王陵)으로 이동했다. 강릉은 고구려의 하슬라(何瑟羅)였다. 내물왕 때 신라 영토로 확실히 바뀌고, 경덕왕 때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명주(溟州)로 되었다. 고려 행정구역 5도 양계(五道兩界) 중 동계에 속했다가 충렬왕 때 강릉이 되었다. 그런데 강릉 건치 연혁을 찾으면서 시청 홈페이지를 보니 강릉이 중국 한무제(재위 BC141∼BC87)가 설치한 한나라 창해군(滄海郡)이었으며,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하고 설치한 한4군 중 하나인 임둔군이었다가 낙랑군 동부도위 관할에 속했다고 써놓았다. 실로 황당하고 안타까운 기록이다. 중국 역사서는 예외 없이 한4군이 하북성 동북부에 있었다 하는데 무슨 기록을 보고 이렇게 썼는지 알 수 없다. 강릉이 옛날에 중국 한나라 식민지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시청에서 이렇게 써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진7 명주군왕릉.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7 명주군왕릉.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씁쓸한 마음으로 명주군왕릉에 도착했다. 남향받이 산기슭에 명주군왕릉이 있는데 입구 주차장 왼쪽에 전각이 몇 채 있다. 내려오면서 살펴보기로 하고 군왕릉으로 향했다. 명주군왕이 누구일가?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 셋째 아들 김문왕 5대손 김주원(金周元)으로 강릉 김씨 시조다. 왕위 계승 과정의 갈등을 봉합하고자 명주군왕이라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무열왕 이후 36대 혜공왕까지는 무열왕 후손이 왕위를 이었으나 혜공왕이 신하들 난으로 피살되고 무열왕 후손이 아닌 17대 내물왕(재위 356∼402) 후손 선덕왕(재위 780∼785)이 37대 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왕이 아들이 없어 다음 왕은 각간 김주원이 1순위 후보였으나 선덕왕 동생이 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이 되었다. 이로써 무열왕 후손 대신 내물왕 후손이 계속 신라 왕위에 오르게 되어 왕위 계승에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갈등을 무마하는 방안으로 원성왕은 김주원을 명주군왕에 봉하고 지금의 양양 삼척 울진 일대를 식읍으로 내려주었다. 왕도에 사는 진골 귀족 김주원을 왜 명주(강릉)군왕에 봉했을까? 여기에는 명주가 김주원 아버지 대부터 근거지였음을 말해주는 아름다운 사랑 설화가 전해온다.

신라 진골 귀족 무월랑(無月郞)이 총각 시절 명주 유후관(留後官)으로 부임했다. 유후관은 지방 주요 지역 행정과 군사를 관장하는 관직이었으나 무월랑은 아래 사람들에게 일을 맡겨놓고 화랑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무월랑은 연화봉 아래 마을에서 아리따운 낭자 연화(蓮花)를 만나 두 사람은 첫 눈에 사랑에 빠져 혼인을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임기가 끝나자 무월랑은 연화낭자에게 반드시 돌아와 혼인하겠다고 약조하고 서라벌로 돌아갔다. 그러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사이 연화 아버지는 인근에 사는 준수한 총각과 연화의 혼인을 착착 진행했다. 혼인날은 다가오고, 무월랑을 잊을 수 없었던 연화는 편지를 써서 집 옆 연못에 키우던 황금빛 잉어에게 사연을 전하게 했다. 잉어는 편지를 삼키고 떠났다. 며칠 지나 무월랑이 친구들과 천렵하다 이 황금빛 잉어를 잡았다. 무월랑을 본 잉어는 마치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입을 벌름거리다 편지를 토해냈다. 사연을 안 무월랑은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 명주에 도착했고, 연화와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

무월랑 이름은 김유정이고 연화 낭자 성은 강릉 박씨였다고 전한다. 강릉 박씨는 신라 파사이사금 5세손 박제상 후손이므로 진골 귀족이다. 무월랑과 연화 낭자는 모두 진골 귀족이었기에순조로운 혼사였을 것이다. 김주원 아버지가 무월랑 김유정이다. 박제상 후손 일파가 명주에 정착한 시기가 무월랑 시기보다 훨씬 빠르므로 먼저 터 잡은 처가 박씨의 배려로 김유정이 명주에 상당한 세력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김주원이 명주군왕이 된 게 아닌가 추정해 본다. 김주원 둘째 아들이 김헌창(金憲昌)이다. 서기 822년 웅천(공주)주 도독이던 김헌창은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옛 백제 강역 전부를 아우를 만큼 컸으나 결국 실패하고 관련자 모두 죽었다. 그러나 당시 명주군왕이던 김주원 큰 아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아 살아남았다. 이후 김주원 후손들이 대대로 명주군왕을 이어받아 강력한 호족이 되었다. 김주원이 명주군왕이 된 것은 신라 하대 호족 발흥에 계기가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족 발흥으로 신라는 중앙 정부 통제력이 약화되어 점차 망국의 길에 들어선 것은 우리 모두 역사에서 배운 바다.

연화부인과 무월랑의 사랑 설화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강릉 사람들에 전승되어 오늘날 여러 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소식을 전해준 잉어가 헤엄치던 연못가에는 무월랑의 월(月) 자와 연화 낭자의 화(花) 자를 딴 월화정(月花亭)이 있고, 그 앞에는 황금잉어 상이 있다. 최근에는 강릉 명물거리 월화거리가 조성되었다. 위 <사진 7>에 보이는 것처럼 명주군왕릉에 예스러운 분위기는 없다. 릉은 방형이고, 석물에도 세월의 이끼가 보이지 않는다. 후손들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선조 무덤을 돌본 결과일 것이다. 풍수를 모르는 필자가 보기에도 묘터는 아주 좋은 자리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강릉 김씨는 후손이 번창한 가문이다. 명주군왕릉에서 내려오면 감주원을 제향하는 릉향전(陵享殿)이 있으나 문이 잠겨있어 들어가 볼 수 없다.

릉향전 옆에 청간사(淸簡祠)가 있다. 청간사는 ‘맑고 대쪽 같은 사당’이란 뜻인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을 배향한 사당이다. 조선 중종 년간에 세운 사당이 6.25에 소실되어 1954년에 새로 지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청간(淸簡)은 정조 임금이 김시습에게 내린 시호인데 매월당 행적을 적확하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시습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이 잘 안다. 조선의 천재였으며 생육신으로 일생을 고고하게 사신 분이다. 스님으로 살았는데 법명이 설잠(雪岑)이며 입적 후 사리가 나와 그의 사리탑이 부여 무량사에 모셔져 있다. 김시습 사당이 왜 이곳 명주 군왕릉에 있을까? 알고 보니 김시습은 명주군왕 김주원 23세손이다. 가문에 영광을 더한 자랑스러운 인물이라 문중에서 기꺼이 사당을 세우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김시습 행적 중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박제상이 지은 선도사서 《징심록(澄心錄)》을 영해 박씨 박효손(朴孝孫)에게서 받아 영해 박씨 강원도 문천(文川) 문중에 전해주어 오늘날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김시습이 선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행적이다. 강릉 사람들은 김시습을 대관령국사소황신(大關嶺國師小隍神)으로 모시고 있다. 매월당 이름 시습(時習)이 익숙한 단어라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찾아보니 세종 때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다.《 논어》 학이편의 學而時習(학이시습)의 ‘시습’이라 되어 있다. 學而時習을 ‘배우고 때로 익힌다’고 여러 문헌에서 풀이했는데 이 풀이는 천재 김시습에게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천재는 배운 것을 때로 익히면 지겨울 것이다. ‘배운 것을 적절한 시기에 실천한다’로 풀이하면 천재에게 어울릴 것이다.

사진 8 김시습 사당 淸簡祠. 제공 허성관
사진 8 김시습 사당 淸簡祠. 제공 허성관

명주군왕릉을 뒤로하고 강릉시 저동길 113에 있는 오늘 마지막 답사 유적 강릉 박씨 제실 경양사(鏡陽祠)에 도착했다. 시골 마을인데 마을 전체를 야트막한 산이 빙 둘러 감싸고 동해를 바라보는 쪽만 터져 있다. 마치 무덤 주변에 야트막한 담을 쌓은 것과 같은 형국이다. 정말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 집들이 모두 현대식으로 큼직하고 멋지다. 수년 전 화재로 불타 새로 지은 집이라 한다. 경양사는 동해를 바라보는 산자락에 있다. <사진 9>에서 보는 경양사는 시골 동족마을 제실과 다름없어 보인다. 20세기 초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유서 깊은 사당이다.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 363∼419)을 배향한 사당이기 때문이다.

사진 9 경양사 전경. 출처 국가유산청
사진 9 경양사 전경. 출처 국가유산청

강릉 박씨는 신라 건국 왕 박혁거세 후손이다. 박제상은 신라 5대왕 파사이사금(재위 80∼112) 5세손이고, 강릉 박씨 중시조다. 강릉 박씨는 박제상 후손 중 강릉에 정착한 사람 후예이고 경양사가 있는 이곳 저동 마을은 이들의 본거지일 것이다. 경양사 안내판에는 박제상 관련 기록은 없고, 고려 때 병부상서와 대장군을 지내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진 박순(朴純)을 소개하고 있다. 위 연화 낭자와 무월랑에서 보듯이 강릉 김씨와 강릉 박씨는 모두 신라 왕실 후예로서 대를 이어 서로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릉에 한국선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대표적인 신라 선가(仙家) 박제상이 남긴 유산일 것이다. 혁거세왕 어머니 파소(婆蘇)신녀는 북부여 공주로서 선도의 스승이었고, 아들이 박씨 왕실을 열자 선도를 신라에 복원하여 확산한 중심 인물이다. 박제상은 혁거세왕 후손으로 선도사서 《징심록(澄心錄)》을 지어 지금까지 한국선도의 교본으로 남아 있다. 박제상 후손 강릉 박씨 DNA로 선도사상이 전해져 강릉에 선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릉은 우리 전통사상 선도를 품은 품격있는 고장이다.

맛있고 푸짐한 해물탕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화양 해변 펜션에 묵었다. 주인도 친절하고, 공기도 청정하고, 식당도 가까운 가슴이 툭 트이는 해변에 위치한 좋은 숙소다. 팬션 옥호가 ‘달을 삼칸 바다’다 멋진 서정적인 이름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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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0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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